여느 천재와 달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릴 줄 알았던 노이만은 결코 나대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타고난 천재성을 숨길 수는 없었다. 위그너는 “노이만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는 완전히 깨어 있고 나는 반쯤 잠든 기분이었다”고 했다. 노이만은 인간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처럼 ‘관찰하는 눈으로’ 동급생들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1850년대에, 독일의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이 또 한번의 도약을 이루어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수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꼽힌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는 리만의 논문을 읽고 “찬란하게 빛나는 창조성의 극치”라며 감탄을 자아냈다.
모든 종류의 치즈케이크로 이루어진 집합을 상상해보자. 여기에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치즈케이크(뉴욕식 치즈케이크, 독일식 치즈케이크, 레몬 리코타 등)가 모두 포함되어 있지만, 집합 자체는 치즈케이크가 아니다. 따라서 ‘모든 치즈케이크의 집합’은 그 집합(자기 자신)의 원소가 될 수 없다. 반면에 ‘치즈케이크가 아닌 모든 것의 집합’은 자신의 원소가 될 수 있다. ‘치즈케이크가 아닌 모든 것의 집합’은 여전히 치즈케이크가 아니기 때문이다. 러셀은 ‘자신의 원소가 아닌 집합의 집합’을 생각해보았다. 이 집합이 자신의 원소가 아니면 애초의 정의에 의해 자신의 원소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원소이면 역시 정의에 의해 자신의 원소가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러셀이 발견한 역설이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거짓말쟁이의 역설(”이 문장은 거짓이다”)도 이런 종류의 역설에 속한다.
독일의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그레테 헤르만Grete Hermann은 노이만의 책이 출간된 후 그의 증명을 철저히 확인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헤르만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엄청난 업적을 이룬 사람이 분명하다. 당시 여자아이들은 원칙적으로 김나지움에 입학할 수 없었고, 굳이 입학을 하려면 학교 재단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 헤르만은 대학을 졸업한 후 수학과 박사학위 과정에 진학했는데, 그녀의 지도교수는 당시 괴팅겐 대학교 수학과의 유일한 여교수였던 에미 뇌터Emmy Noether였다. 몇 년 전, 괴팅겐의 사학과와 언어학과 교수들이 뇌터의 채용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 힐베르트가 그들을 향해 날렸던 대사는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진다. “저는 지원자의 성별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긴 대학교잖아요. 목욕탕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성을 차별하는 분위기 속에서 헤르만과 뇌터는 강한 유대감을 느꼈고, 두 여인은 서로를 진심으로 아껴주었다. 그러나 헤르만은 1925년 2월에 박사학위 과정 졸업시험을 통과한 후 전공을 철학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당시 뇌터는 헤르만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로 임용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기에, 제자의 변심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4년 동안 수학 공부를 그토록 열심히 해놓고 이제 와서 갑자기 철학적 재능을 발견하다니, 축하를 해야 할지 말려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구나!”
몇 가지 증거에 의하면 독일은 이미 1943년 3월부터 미국의 핵폭탄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정책 입안자들은 독일에 투하한 핵폭탄이 불발되었을 경우, 독일의 과학자들이 그것을 분해하여 그들만의 폭탄을 만들 수도 있다며 폭탄 투하를 반대해왔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당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일본의 과학기술이 독일보다 못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인종차별주의에서 해답을 찾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인은 일본에서 건너온 이민자를 몹시 경멸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직후 미국 정부는 수천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집단수용소에 가둬놓고 평범한 시민을 범죄자로 모는 등 인종차별과 전시 히스테리wartime hysteria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것은 전시상황에 벌어진 비상대책이라기보다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에 가깝다. 혹자는 핵폭탄을 ‘진주만 공습의 복수’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이건 간에, 맨해튼 프로젝트에 차출된 비-미국 출신 과학자들에게 “여기서 만든 핵폭탄은 독일이 아니라 일본에 떨어질 것”이라고 미리 통보했다면, 그들은 도중에 그만두거나 애초부터 합류하지 않았을 것이다.
ENIAC은 1930년대에 미국을 강타한 경제 대공황 때문에 학자의 꿈을 접은 전직 물리학 교사 존 모클리John W. Mauchly의 작품이다. 그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학부 과정을 속성으로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1932년에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잠시 동안 연구조교로 재직하면서 적당한 일자리를 물색했는데, 때마침 사상 최악이자 최장의 경제공황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번듯한 대학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클리와 에커트는 노이만이 수백만 달러를 훔쳤다며 맹렬히 비난했고. 노이만이 그들(모클리와 에커트)의 가장 큰 경쟁사로부터 수천 달러를 받고 자문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격분했다. 그때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 두 사람의 분노는 노이만이 죽은 후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노이만이 세상을 떠나 고 무려 20년이 지난 1977년에 에커트는 한 인터뷰 자리에서 노이만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노이만은 우리가 개발한 모든 아이디어를 IBM에 알뜰히 팔아넘겼습니다. 그것도 앞문이 아닌 뒷문으로 말이죠.”
그가 바로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과학자 할로 섀플리Harlow Shapley의 아들인 로이드 섀플리Lloyd Shapley였다.
“동전을 허공에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 확률과 뒷면이 나올 확률, 그리고 옆으로 똑바로 설 확률이 모두 같으려면, 동전의 두께와 반지름의 비율은 얼마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화젯거리로 떠올랐는데, 노이만이 즉석에서 답을 제시하자 윌리엄스는 기술자에게 당장 그런 동전을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고, 노이만의 처방에 따라 절삭기로 갈아서 만든 두툼한 동전은 정말로 모든 확률이 똑같았다.
그러나 과학자들 중에는 두 분야를 고립된 채로 놔두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 로버트 엡스타인Robert Epstei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두뇌를 일종의 컴퓨터(정보처리장치)로 간주하는 노이만식 관점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바람에 신경과학이 오히려 퇴보했다. 두뇌와 컴퓨터의 유사성을 추적하는 연구가 지난 반세기 동안 수도 없이 실행되었는데도 얻은 것이 거의 없으니, 이제 ‘DELETE 키’를 누를 때가 되었다.” 하지만 컴퓨터 말고 딱히 비유할 대상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노이만의 암은 참으로 잔인한 시기에 찾아왔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부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53년에 노이만의 초청을 받아 고등연구소에 합류했던 브누아 델브로Benoit Mandelbrot는 그 시기를 회상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프린스턴에 머무는 동안 노이만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수학자들은 그를 더 이상 수학자로 취급하지 않았고, 물리학자들도 그가 단 한순간도 진정한 물리학자인 적이 없었다며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는 컴퓨터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프린스턴으로 초빙했는데, 기존의 학자들은 그들을 ‘프로그래머’라 부르며 고매한 학문의 전당에 빌붙어 사는 하층민으로 취급했다. 한마디로 노이만은 고등연구소에서 기피 대상 1호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