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리스는 열이 내리자마자 꼬박 이틀 동안 떠올랐던 생각들을 글로 정리했다. 그리고 가장 존경 하던 찰스 다원에게 편지를 썼다. 월리스는 이렇게 밝혔다. “제 생각이 선생님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게 되기를 바라며,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858년 6월 18일, 찰스 다윈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월리스에게서 편지를 받고 갑자기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다윈은 윌리스의 편지를 읽으면서 열세 살이나 어린 독학 박물학자가 자신이 수십 년간 발전시켜온 이론을 혼자 찾아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놀라운 우연의 일치는 본 적이 없다.” 다윈은 지질학자인 친구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경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심지어 월리스가 사용한 용어는 내 책의 서두에 나오는 것들과 같다.” 다윈은 “내 이론의 독창성이 완전히 무너지게 됐다”고 했다. 아직 자신의 이론을 출간할 계획이 없었던 다윈은 월리스의 편지를 받고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월리스의 생각을 훔쳤다는 비난은 받고 싶지 않았다. 다윈은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다져온 내 입지가 무너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내 책을 모두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비열한 인간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학자 협회인 린네협회에 모인 다윈의 동료들은 누구를 ‘종의 기원’ 창시자로 정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월리스는 뉴기니에서 계속 극락조를 찾고 있었다. 1858년 7월 1일, 라이엘은 협회에서 이렇게 생각을 밝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각자 독자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독특한 종의 출현과 영속을 설명하는 매우 독창적인 이론을 동시에 정립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종의 기원이라는 중요한 연구에 있어서 공평하게 독창적인 학자임을 주장할 수 있다.”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를 설명한 월리스의 놀라운 업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표본마다 꼼꼼하게 기록을 남기고 지리적 분포에 끈질기게 주목한 덕분에 월리스는 생물지리학이라는 새로운 과학 분야의 창시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월리스는 발리와 롬복사이에 있는 깊은 해협을 경계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붕과 아시아 대륙붕에서 발견되는 종들이 나뉜다는 것을 알아 냈고 이 지점은 현재 지도상에 ‘월리스선Wallace Line’으로 표시된다. 말레이제도 동쪽에 펼쳐진 33만 7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은 ‘월러시아Wallacea’라 불리는 생물지리학적 구 역으로 지정돼 있다.
왜가리와 타조 같은 새들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때부터 전 세계 곳곳에 기업형 농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왜가리 같은 새는 새장에서 기르기 힘든 종이기에 가느다란 면실로 위아래 눈꺼풀을 꿰매어 앞을 보지 못하게 하고 길들이기도 했다. 새들은 이렇게 부를 창출하는 수단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아갔다. 1912년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배에서 가장 값나가고 보험료가 높았던 물건도 바로 깃털 상자 40개였다.
미국 식민지 초창기에는 강에 연어가 너무 많아서 밭을 가는 쇠스랑으로 강가를 한 번 훑기만 해도 연어를 잡아 올릴 수 있었다. 농부들은 이렇게 잡은 연어들을 갈아서 비료로 썼다. 철새 떼는 한번 날아들면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을 정도였다. 1813년 존 제임스 오듀본은 비행하는 여행비둘기 떼 아래에서 3일 내내 이동한 적도 있었다. 초원에 들소가 너무 많아서 어떤 군인은 말을 타고 들소 무리를 뚫고 지나가는 데 꼬박 6일이 걸렸다.
미국인들은 ‘명백한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서부로 눈을 돌리고는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라는 성경 말씀을 그 대로 실천했다. 그들은 미국 전역을 산업사회로 만드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땅에서 캐내는 구리와 철과 금은 부족해질 리가 없었고, 물고기와 새도 무한히 새로 태어날 것이 며, 숲속의 떡갈나무도 영원히 새로 자라날 거라고 생각했다. 1900년 당시에는 자원에 굶주리던 인구가 1억에서 16억으로 늘었지만, 기계가 나타나 인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원재료를 캐내고 가공하게 되었으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연발총으로 무장한 미국인들은 신의 축복 아래 태평양으로 향하는 길을 휩쓸었다.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1831년에 미국을 여행한 뒤, 그곳 사람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은 생기를 잃은 자연 앞에서도 무감각하다. 그들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황야를 가르며 행진하는 자신들을 바라보고, 늪을 말려버리고, 강의 경로를 바꾸고, 불모지를 사람으로 채우고, 자연을 굴복시켰다. 19세기 말, 미국 들소는 6억 마리에서 300마리까지 줄었다. 개척민들이 기차를 타고 지나가며 심심풀이로 들소들을 쏘아 죽였기 때문이다. 수십억 마리였던 여행비둘기는 1901년경 거의 멸종될 정도로 총질을 당했다. 에버글레이즈에서는 엽총을 휴대한 운동선수들이 보트를 타고 악어와 왜가리들에게 총을 쏘아댔다. 총소리와 화약연기와 죽음의 향연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숲에서 셰익스피어보다 더 나이 많은 나무들이 잘려나가 제재소로 보내졌다. 그 동안에도 깃털 열병은 계속됐다.
로비스트들은 깃털 사업을 막는 법안을 만들면 일자리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경제 위기가 초래될 것이라고 의원들에게 경고했다
나는 새를 보존하는 일이 인류에게 희망적인 비전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큐레이터들은 인류가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박물관 표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곤충, 햇빛, 독일군의 폭격, 화재, 도난으로부터 소장품을 보호해왔던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내고 있는 표본들이 과학자들이 아직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다고 믿었다.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몇 달이 몇 년이 됐다. 그동안에도 사라진 새들을 찾겠다는 내 집념은 점차 자신만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자랐다.
“야생동물 불법 거래가 바로 우리 옆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라도 알리려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녔어요.” 그가 말했다. “그곳 뉴저지에서는 온갖 열대 지방 새들이 그렇게 버젓이 팔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다른 연구 활동들 때문에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박사도 한동안 에드윈 리스트를 쫓아다녔다고 했다. 피해를 본 종에 대해 자세히 알려달라고 트링박물관을 압박하고, 그로서는 없어지기를 바라는 취미 활동의 실상을 파헤쳐줄 기자를 찾아다녔다. “당신이 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소.” 그는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으며 말했다. 책상에는 몇 년간 모았을 메모지와 학술지, 고장난 컴퓨터 모니터, 각종 서류 봉투, 황금앵무새 깃털이 담긴 대형 지퍼백이 있었다. 머그잔은 적어도 일곱 개 이상 있었고 <스타워즈> 캐릭터인 다스 베이더 얼굴의 보블헤드? 인형도 하나 놓여 있었다. 박사는 심포지엄에 관한 노 트를 한참 만에야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