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하노 벡, 우르반 바허, 마르코 헤르만 (지은이), 강영옥 (옮긴이) | 다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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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에 국가는 국민들에게 일정한 가치를 약속하는 지폐를 주고 국민들은 이 지폐에 적힌 가치만큼 상품을 구매한다. 그런데 나중에는 굳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이게 무슨 말일까?

결론적으로 화폐 발행권을 갖고 있던 국가는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국민이 소유하고 있는 화폐에는 명시된 금액만큼의 가치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국민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화폐 주조 비용이 공제된 금액이다. 이것을 화폐주조차익Monetary Seigniorage (중앙은행이 화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함으로써 얻 는 수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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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증은 발행자의 상환 능력만큼 가치가 있다. 돈을 빌려간 사람이 돈을 갚을 수 있을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면 차용증은 가치가 없어진다. 이 경우에는 아무도 차용증을 지불수단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차용증이 있어봤자 소용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지폐는 차용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발행자가 이웃이 아니라 중앙은행이라는 것이다. 지폐에 명시된 가치는 그만큼 되돌려주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이 아니다. 지폐의 가치는 국민 이 벌어들일 수 있는 GNP, 즉 화폐의 범위 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통해서 보장된다.

당신이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내면 ‘GNP’라고 부르는 케이크의 큰 조각을 가질 수 있다고 하자. 이때 당신은 이 돈을 지불수단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GNP의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거나 실적이 점점 떨어지면 이 돈으로는 재미를 볼 수 없다. 당신은 이 화폐를 기피하고 다른 화폐나 다른 지불수단으로 바꾸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잃지 않으려고 할 때 보여주는 행동이다.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때도 유사한 행동을 한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 방법 말고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치가 보장되지 않는 현대 화폐의 맹점이다. 국민들이 화폐가 제 기능을 하는지 신뢰할 때만 화폐의 가치는 유지된다. 화폐는 곧 신뢰다. 화폐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화폐에 대한 가치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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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 환율

내 돈이 인플레이션 때문에 가치를 상실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물론 국가에서 발표하는 공식 인플레이션율을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이 수치는 언제든 조작될 수 있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 이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지표는 암시장의 비공식적 환율이다(공식 주가도 간혹 정부에서 조작을 한다). 자국 통화에 문제가 있을 때 보이는 조짐이 있다. 1차 신호로, 비공식 환율이 급락한다. 2차 신호로, 국제 투자자들이 대출 금리 인상을 요구한다. 해당 국가의 유가물(有價物, 경제적 가치가 있는 물건) 가격이 인상되고 정부는 인플레이션에는 문제가 없다고 확신을 한다. 이런 상황의 국가에 여행을 할 때는 현금인출기나 환전소를 이용하지 않는 편이 낫다. 현금인출기나 환전소에서는 공식 환율을 적용하기 때문에 손해가 훨씬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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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는 파탄난 로마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먼저 그는 모든 재화에 최고가를 적용하고 최고가 규정을 위반하거나 물건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에게 는 사형에 처한다는 명문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대형 돌판에 새겼다. 다음으로 그는 물가 상승을 법으로 억제시키려 했다. 하지만 두 정책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각국에서 물가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와 유사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아서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그것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돌리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천 년 전의 인플레이션 억제책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최고가 규정을 도입한 국가에는 절대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최고가 규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정책이 실패했다는 의미다. 정부에서도 갈피를 못 잡고 있기 때문에 이런 국가에서는 물건을 파는 것보다 보유하고 있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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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가치는 흑사병과 함께 사라져갔다. 모든 영역의 물가가 하락하면서 고통이 시작되었다. 생산 제품의 잠재적 소비자가 흑사병으로 사망하여 재화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다. 경제학자들은 이때를 디플레이션 시기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