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인용의 정확한 위치를 생략했고, 순서만 지킴)

호니그가 양적완화에 반대한 이유는 이것이 전례 없는 양의 화폐를 공급하게 될 테고 그 돈이 월가의 거대 은행으로 먼저 흘러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호니그는 이 돈이 매우 부유한 사람과 나머지 모든 사람 사이의 격차를 더 크게 벌리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자산을 소유한 극소수는 혜택을 보겠지만 월급 받아 살면서 저축하려고 노력하는 아주 많은 사람에게는 해가 될 터였다.

티파티가 위력을 발휘한 선거 이후 의회는 어느 방식으로도 이러한 문제를 다룰 수 없었다.

호니그와 의장인 버냉키의 관계는 원래도 가깝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거의 적대적이 되었다. 몇 년 뒤에 버냉키가 펴낸 회고록에 남에 대한 옹졸한 험담은 그리 많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러한 부분은 상당수가 호니그를 향한 것이었다. 버냉키는 호니그를 충성심이 없고 고집이 세며 심지어는 다소 편향된 사람처럼 묘사했다.

댈러스 연은의 피셔는 이 계획이 매우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근사한 은유로 발언을 시작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양적완화는 시장 운영의 칡뿌리와 같습니다. 계속 자라고 또 자라기 때문에 일단 뿌리를 내리고 나면 제거하거나 쳐내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피셔는 이 계획이 본질적으로 거대 은행과 금융 투기 세력에 혜택을 주고 은퇴를 위해 저축했던 사람들을 처벌하는 격이 된다는 호니그의 우려에 의견을 같이했다. “이 정책을 실행하면 가난한 사람, 대부분 고정 소득에 의존하는 사람, 저축을 한 사람들에게서 부자들에게로 소득을 옮기는 결과가 될 위험이 상당하다고 봅니다.”

연준은 소비자 물가만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산 가격도 올리고 있었다. 호니그 같은 은행 감독관들이 보기에 자산 인플레이션은 매우 경악스러운 종류의 인플레이션이었다. 캔자스시티 연은 관할 지역의 은행들이 담보로 잡고 있는 핵심 자산은 농지였는데, 농지 가격이 급격하게 오르고 있었다. 상업용 부동산도, 유정도 그랬다. 이러한 자산이 은행들의 대차대조표에 올라와 있었는데, 이 자산들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은행들은 더 공격적인 대출을 하도록 부추겨졌다. 중서부 지역 전역에서 은행들은 농지 가격이 앞으로도 계속 오르리라는 전제에서 농민들에게 대규모 대출을 해주었다. 상승하는 담보 가치가 대출금을 충분히 지탱해주리라고 본 것이다. 석유 산업도, 부동산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호니그는 부동산 가치가 빠르게 오르고 있으니만큼 건물이 완공되자마자 재융자가 가능하리라는 전제하에 건설 분야로 단기 대출이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은행들이 더 위험한 대출을 하도록 몰아갔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는 은행과 투자자가 돈을 저축하려 할 유인을 없앴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저축으로 약간의 이자를 얻어도 오히려 손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그 돈을 가지고 더 좋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했다. 은행들은 점점 더 수익률 곡선의 먼 쪽으로 내몰렸다. 호니그의 팀은 이 상황을 보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산 가격이 올랐으므로 은행들이 자신이 내어준 대출이 안전하고 은행 건전성도 안정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은 감독관들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려 해도 장부의 숫자들이 은행 편이었다.

장기간의 인플레이션이 예기치 못하게 뚝 멎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게 될 터였다. 호니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막대한 붕괴가 발생하게 됩니다. 줄도산과 줄손실과 줄위기가 이어집니다.”

그는 경제학자들이 ‘자산버블’이라고 부르는, 매우 강력하고 지극히 다루기 어려운 현상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알게 되었다. 수십 년 뒤인 오늘날 1970년대의 대인플레이션은 대개 자산버블이라고 묘사되지 않는다. 오늘날 1970년대를 되돌아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재앙의 절반만 이야기한다. 고깃값이나 휘발윳값 같은 소비재 물가가 충격적으로 올랐던 시기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인플레이션이 파괴적이었던 진짜 이유는 두 종류의 인플레이션이 상호연결되어 서로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절반이 자산 인플레이션이며, 자산 인플레이션은 이후 미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된다. 2000년의 닷컴 붕괴도 자산버블이 터진 것이었고 2008년 주택시장 붕괴도 자산버블이 터진 것이었으며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시장이 전례 없이 붕괴했을 때도 큰 요인 중 하나가 자산버블이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볼커가 금리 인상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그가 정말로 금리를 올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리를 올리기 시작한 직후인 1979년 10월에는 그가 압력 때문에 사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연준이 경제를 침체에 빠뜨릴 정책을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였다. 볼커는 토요일 저녁에 에클스빌딩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사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연준은 금리 인상에 진지하다고 선언했다. “최근 돌고 있는 소문과 달리 저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 주 주말에 11.6%이던 단기 금리는 그달 말에 16%가 되었고 1년도 안 되어 20%에까지 도달했다. 그 토요일 저녁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급격한 금리 인상이 경제에 피해를 끼치지 않을지 질문했는데, 볼커는 이 질문을 대체로 일축했다. “저는 이러한 조치의 결과에 대해 낙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불확실한 세계에서 입수 가능한 최선의 지표들을 보건대, 경제의 조정 과정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부드럽게 달성될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고 보입니다.” 볼커의 이 말은 틀렸다. 어떤 것도 합리적인 수준에서 부드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미국의 경제 생태계는 저금리를 북극성 삼아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볼커가 느닷없이 북극성을 치워버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재조정되어야 했다. 지난 10년간의 자원 배분 양상이 달라져야 했고 모든 것이 수익률 곡선의 가장자리에서 다시 안쪽으로, 덜 위험한 쪽으로 돌아와야 했다.

은행에 대한 연준의 긴급 융자는 재할인 창구를 통해 나가는데, 호니그는 1980년대 초에 캔자스시티 연은의 재할인 창구를 관리했다. 그의 팀이 어느 은행이 이 창구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지를 결정할 때, 이것은 은행의 생사를 가르는 선고를 내리는 격이었다. 1982년에 진정한 은행 패닉이 터졌고, 이는 대공황 이래 최악이었다. 8 그해에 100개 넘는 은행이 도산했는데, 한 해 도산 건수 기준으로 1930년대 이래 어느 해보다도 많은 수였다. 1986년에는 심지어 이 숫자가 더 늘어서 200개가 넘는 은행이 도산했다. 1980년에서 1994년 사이에 총 1,600개 이상의 은행이 도산했다.

호니그는 어리석은 대출이 전적으로 은행들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은행들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그에 비해 낮은 금리, 그리고 상승하는 자산 가격이라는 거시 경제 환경에 반응해 의사결정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거시 경제 환경은 은행들이 만든 게 아니라 호니그가 일하는 기관, 바로 연준이 만든 것이었다. 호니그는 이렇게 말했다. “은행들은 자산 가치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낙관적이던 환경에서 대출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 환경은 10년이나 너무나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했던 잘못에서 야기된 면이 컸습니다.” 이 부분은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과 그것의 붕괴, 그리고 1980년대의 침체를 이야기할 때 너무나 자주 간과되곤 한다.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끝냈고 살아남은 건전한 은행을 구제해주었다고 칭송받았다. 하지만 수십 년 후 나온 연구는 이 재앙 전체에 연준이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순전한 실수에 기인한 부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먼 훗날 데이터가 업데이트되고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연준이 고려했던 몇몇 데이터가 잘못되어 있었다. 잘못된 데이터 중 특히 중요했던 것은 연준이 물가 인플레이션을 일관되게 저평가한 것이었다. 이것은 곡사포 관제병이 오류가 있는 기상관측기구가 보내오는 정보에 기초해 발사 지시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외부의 실제 여건이 벙커 안에 있는 팀이 생각하는 것과 달랐던 것이다.

당시 연준은 그 시기의 많은 저명한 경제학자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연준과는 관련 없는 외부적 요인들이 비용을 밀어올려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는 이론이다. 거대 노조가 노동 비용을 밀어올린다거나 중동의 석유 카르텔이 유가를 밀어올린다는 식으로 말이다.

연준은 단지 자산버블만 부추긴 것이 아니었다. 연준은 버블이 커지던 동안 가장 많은 수익을 올렸던 은행들을 버블이 붕괴할 때 구제하는 일에도 나서야 하게 되었다. 어떤 은행들은 너무 크고 너무 깊이 상호 연결되어 있어서 망하게 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